이 말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그의 저서 「나는 고발한다」에 썼던 문장이다.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박정훈 대령’ 사건과 중첩되는 이미지를 가진다.
1894년 프랑스 장교였던 유대인 출신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는 간첩 혐의를 둘러싼 사건에 휘말린다. 드레퓌스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돼 별다른 물증도 없이 단순히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드레퓌스의 가족은 진상을 알아내고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가인 에밀 졸라가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지정하여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한다. 이 글을 계기로 사건은 19세기 후반 수년 동안 반유대주의로 프랑스를 휩쓸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그리고 이에 맞서 정의, 진실, 인권을 부르짖었던 양심 세력 간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드레퓌스는 1906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35년 7월 12일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고 90년이 지난 2025년 6월 2일 드레퓌스를 준장 계급으로 추서하는 법안이 프랑스 하원에서 통과됐다. 유럽을 휩쓸었던 ‘반(反)유대주의’의 희생양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차원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프랑스 하원 의원 197명이 만장일치로 드레퓌스를 준장으로 승진시키는 법안을 채택했고,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7월 12일을 ‘드레퓌스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기로 정했다.
세계적 문화 선진국 대한민국은 박정훈 대령을, 죽어서가 아니고, 살아서 장군으로 진급을 시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프랑스보다 품격 있는 나라가 되는 지름길이다.
임은정의 삶은 또 어떤가. 그는 검찰 내에서 아주 오랜 시간 홀로 고독하게 개혁을 외치며 내부고발자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그를 동부지검장으로 임명했다. 많이 늦었으나 조금이나마 정의를 구현했다. 우리는 그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이 되는 세상을 보고 싶다.
그런가 하면 최근 호루라기 재단에서 기획한 행사에 출연한 공익제보자 강혜경 선생님은 또 어떤가. 불의한 세력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할 수 없어 양심선언을 하고 공익을 위해 제보한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그가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일하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안위와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깨지는 것을 감내하면서 공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분들이 계신다. 그들은 여전히 보복과 징계와 소송에 시달리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시간을 온몸으로 감수하고 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존경과 존중의 뜻을 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책무이자 도리이다. 살아서는 그들을 포상하고, 죽어서는 그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품격 있는 사회로 거듭난다.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서, 문화적 역량으로는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우리 한국 문화의 힘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공익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을 더 잘 보상하고 포상하는 문화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세상의 평범한 모습이다.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이들을 위한 보상은 국가의 책무이자 도리에 해당한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관리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며 경영자가 되는 세상이 품격 있고 세련된 사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내부고발자를, 공익을 위한 제보자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보복하며 징계하는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야말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품격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는 조금 더 품격 있고, 수준 높은 사회에서 살만한 자격이 있지 않은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에서 천명했던 그의 글을 공유한다.